[리뷰] [책] 헤르만 헤세 – 크눌프

 

 

나긋하고 예쁜 말투로 쉬운 언어로 그래도 괜찮다고 해줬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하세요!

더보이즈 주연이 읽으라고 해서 읽었다 (현재 중증 더보이즈 오타쿠이다) 대학교 들어온 이후로 자꾸 트위터에서 짧은 글만 읽거나 아니면 과제로 읽어야 되는 것들을 읽거나밖에 안 해서 본격적인 책(픽션)을 잡은 것은 상당히 오랜만인데, 분량적으로도 문체적으로도 제법 부담없이 읽혀서 다행스럽기도 했고 다시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국어판으로 읽었고 원문장이 쉽게 떠오를 정도였어서 원서로 읽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영어글은 속도가 느려서 두려워한다)

줄거리 요약. 어렸을 때부터 성적으로 조숙했던 남자애 크눌프는 첫사랑에게 인생을 바치려다가 그대로 말아먹어버리고 이후 약속이라는 것의 무게감을 늘상 피해다니며 폐병걸려 죽을때까지 놀고 먹고 여자꼬시고 방랑하면서 산다. 크눌프는 아주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서 십몇년전 사람도 다시 만나면 그때 있었던 일을 줄줄 말할 수가 있다. 뭐 대충 그런 식으로 인연팔이 추억팔이하면서 아무데나 돌아다니다가 죽을때가 다됐을때는 고향 눈밭에서 신이랑 얘기하다가 편안하게 죽는다.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아무래도 (매우 좋아하는 중인) 아이돌 멤버한테서 추천받았다 보니 그쪽으로 연결지어서 자꾸 생각하게 됐는데 특히 주연은 예전에도 순간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작중에서 크눌프도 며칠짜리 연애감정을 이끌어냈다가 그대로 도망치는 일을 반복하는데 그 역시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서 변하고 져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라고. 아이돌이라는 직업도 그런 느낌이 아닐까 아주 많은 사람에게서 좋아하는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을 업으로 삼되 탈덕은 보지 않고 미련도 갖지 않는… 좋아함도 젊음도 아름다움도 순간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쓸쓸해진다 좋아함이라는 감정은 언제까지나 그대로면 좋을텐데 실제로 그랬던 적은 없다. 그는 아이돌이라는 일도 순간의 아름다움을 최대출력으로 끌어내기 위해 선택한 것인지 궁금하다 (궁예) 순간과 덧없음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얘기가 나오는데 “지금 당장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 있더라도 실제로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지금 모습 그대로 있기를 선택할 것” 이라는 구절이 인상깊었다. 얇고 넓은 인연만을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다 요절하는 크눌프의 폐병도 그런 덧없음과 끝이 있음 언젠가는 저물어야 할 것 등등을 나타내고 있는 거겠지.

크눌프는 어렸을 때의 배신당한 기억 때문에 사람들과 깊고 진솔한 관계를 맺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눈밭에서 신은 그가 평생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한 것을 이야기하고 또 크눌프 본인은 중요하다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소중한 기억들을 일깨워주며 결국 그의 행동이 모두 선한 행동이고 참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며칠 몇 시간 몇 분짜리 관계더라도 지나고 나면 덧없고 부질없을 일들이라도 우리는 모두 마음을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건 덧없을지언정 부질없게 여길 수가 없다. 순간의 행복 순간의 즐거움을 쫓아 헤매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후반부에서 그 모든 방황마저 온전히 나의 모습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뚜렷하게 위로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는 말은 아무래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쉽게 듣기 힘든 이야기다. 나의 로맨틱/섹슈얼적 취향도 언제나 겹겹이 쌓여버리는 관심사도 모두 어떤 상처나 트라우마의 결과가 아닌 사회부적응의 결과가 아닌 그저 나라서 그렇다고 해주는 사람이 또 그래도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크눌프>는 나에게 꿈꾸는 것처럼 예쁘고 따뜻한 문장으로 그렇게 위로해줬다. 내 자신에 확신이 없을 때 또는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꺼내읽기 좋은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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